단절된 듯해도 이어진 공간, 아파트
IndigoB

윗집 부부
소설/시/희곡황보름
★★★★★밤이 깊어지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상자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해진다. 숨을 죽이고 있으면 천장 너머나 벽 너머에서 아득하게 쿵 하는 소리, 혹은 무언가 쓸리는 소리가 작게 건너온다. 예전 같았으면 일상의 평온을 흔드는 불청객처럼 여겨졌을 그 소소한 흔적들이, 황보름 작가의 소설 [윗집 부부]를 읽고 난 뒤로는, 어쩌면 누군가가 이 밤을 온 힘으로 견뎌내고 있는 소리라 생각되며 달리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늘 서늘한 수치로 우리의 불안을 증명하곤 한다.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극초저출생'이니 '인구 절벽'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들을 쏟아내며 당장이라도 나라가 망해 사라질 듯 경고한다. 그러나 통계에 담긴 숫자들 뒤엔, 정작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온몸으로 그 무게를 버텨내고 있는 개개인의 지극히 구체적인 삶과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 황보름 작가는 바로 그 차갑고 메마른 통계 보고서의 행간 속으로 걸어가, 외롭고 팍팍한 밤을 지새우는 보통 사람들의 가파른 숨소리를 나지막이 담아낸다.
이야기 속 일흔 나이의 '오경직'은 은퇴 후 집 안의 정적과 가끔씩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쓸쓸한 노년의 그늘을 실감하는 인물이다. 평생을 성심껏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홀로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켜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는 늙고 외로운 아빠. 그런 그가 뉴스에서 "이대로 가면 세상을 되돌릴 수 없다"라는 앵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낀 건, 무슨 거창한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이제 겨우 두 살인 손녀 루다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잿빛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아득한 공포였을 것이다. 일평생 묵묵히, 남 일에 나선 적 없던 고집스러운 몸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딱 한 커플이라도 설득해 보자"라며 마음을 조급하게 다잡는 경직의 모습은 어딘가 엉뚱하고 가슴 한구석을 짠하게 만든다.
경직이 설득의 표적으로 삼은 이들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윗집에 이사 온 젊은 부부 '봄'과 '가을'이다. 하지만 인생 선배로서 부부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겠다며 다가선 경직이 마주한 것은, 대책 없는 청춘들의 무책임이나 이기심이 아니었다. 혹독한 경기 불황의 칼바람 속에서 회사 밖으로 튕겨 나와, 생애 처음으로 큰마음먹고 창업한 식당이지만 손님이 오지 않아 조용한 백반집을 차려두고 생계와 고용 불안 속에 하루하루 간신히 때우며 사는 청년들의 팍팍한 현실이었다. "요즘 애들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아냐"는 자식들의 일침과,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악착같이 매달리는 윗집 부부의 고단한 일상 앞에서 그동안 경직이 굳게 믿어왔던 삶의 당위는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과거 서울에서의 삶을 '철봉 매달리기'에 비유하던 부부의 고백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턱걸이는 철봉에 턱이라도 걸어보는 것이라지만 자신들의 삶은 오래전부터 팔 힘과 악력이 모자라 다리와 겨드랑이까지 걸고 간신히 매달려 있다가 결국 추락하고 마는 일상이었다는 그 자조 속에는, 아이를 낳아 키우라는 기성세대의 훈계가 얼마나 아득하고 잔인하게 느껴졌을지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주는 가장 깊은 위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타인을 나의 기준대로 바꾸려 들던 경직의 오만한 목적의식은, 젊은이들이 짊어진 구체적인 삶의 무게를 마주하면서 점차 고요한 경청으로 바뀐다. 소리 없는 텔레비전 화면 속 폭설이 쌓인 마당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던 한 노인의 뒷모습처럼, 경직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되 정작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는 어설픈 조언을 건네는 대신, 부부가 차려내는 백반집의 소소한 일상을 가만히 지켜보고 그들의 서글픔에 가만히 곁을 내어주는 존재가 되어간다.
"나는 성심을 다해 살았어"라는 소설 속 대사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의 삶도 거저 이어지는 것은 없다. 일흔의 할아버지와 윗집 젊은 부부는 대한민국 사회의 거대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내는 영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을 견디고 있음을 알아채는 순간, 차갑고 삭막하게만 느껴졌던 아파트 콘크리트 벽은 서로의 체온이 살포시 건너가는 따뜻한 장소로 탈바꿈한다.
참된 공감이란 타인의 삶을 지적으로 해부하거나 분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의 일상이 내일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기도하듯 바라봐주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소설은 나지막하게 일깨운다. 마지막 장을 덮고 소파에 가만히 누워, 머리 위 천장 너머에서 다시금 크고 작게 건너오는 생활 소음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내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소음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오늘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내쉬고 있는 가닿지 못한 숨소리일지도 몰랐다. 문득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나는 천장과 벽 너머 이웃에게 가만히 다정한 온기를 보내고 싶어졌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
*이 서평은 브런치 스토리 IndigoB's Brunch에 올린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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