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 — 『행복의 정복』을 읽고
사월이

행복의 정복
인문학버트런드 러셀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 행복이라는 단어가 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공직에서의 번아웃, 그 후의 공백. 행복을 '정복'한다니 거창했는데, 읽으면서 자꾸 나를 돌아보게 됐다.
경쟁 챕터에서 나는 경쟁의 뿌리가 결국 교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야 존재 가치를 느끼는 마음. 조직에서 팀장일 때 내가 빠지면 안 돌아간다고 믿었다.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과도하게 책임을 졌고, 1년간 번아웃이 왔다. 공직 초기에 한 선배가 해준 말이 있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 더 많은 기회가 보일 거야." 정말 그랬다. 러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조용히 신경을 안정시키는 여가는 권태로운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그래서 계속적인 가속이 반드시 요청되기 마련이다."(1부, '경쟁') 나도 자기개발서만 읽으며 소설을 낭비라 여겼는데, 독서모임에서 소설의 순수한 기쁨을 되찾았다. 러셀은 "독서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는데, 하나는 즐기려는 동기이고 또 하나는 자랑하려는 동기이다"(1부, '경쟁')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자기개발서를 읽던 시절의 나는 완전히 후자였다. 읽는 행위 자체가 경쟁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그 무용한 시간이 나만의 진짜 기쁨이었다.
죄의식 챕터가 가장 어려웠다. 기독교인인 내게 돈에 대한 죄의식은 오래된 숙제다. 돈은 가치중립적인데 추구하면 세속적인 것 같고, 그 죄의식을 깨려는 것 자체가 또 죄의식이 된다. 러셀은 "당신의 죄책감의 원인을 낱낱이 검토해보고 이러한 감정이 터무니없다는 데 대해 확신을 가져라"(1부, '죄의식')고 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죄의식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열등감을 준다"(1부, '죄의식')고까지 말한다. 머리로는 동의한다. 하지만 융의 분석심리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묻고 싶다. 집단 무의식에 뿌리내린 것을 이성 하나로 정말 깰 수 있을까. 러셀은 할 수 있는 사람이었겠지만, 범인인 나에게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러셀이 "관대한 태도는 안정과 자기 신뢰의 결과"(1부, '죄의식')라고 한 대목에서는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죄의식을 이성으로 깨부수는 게 아니라, 안정된 자기 신뢰가 먼저 쌓이면 죄의식이 자연스럽게 옅어지는 게 아닐까.
열의 챕터에서는 이 구절이 남았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한 가지 욕망에 과도하게 탐닉하는 사람은 대개 심각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그는 이 유령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2부, '열의') 20대에 스타크래프트에 미쳐 있었는데, 그건 열의가 아니라 현실도피였다. 첫 직장의 무게와 친구들과의 비교로부터 잊고 싶었던 것이다. 러셀의 말대로라면 그때의 나는 "대상 자체가 주는 쾌락이 아니라 망각을 추구"(2부, '열의')하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열의는 없다. 솔직히 그게 좀 힘들다. 하지만 이 독서모임에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만큼은 열의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러셀에게서 따뜻함을 느꼈다. 날카로운 분석 뒤에 동료인 인간을 향한 관심이 있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이자 자유로운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2부, '행복한 사람') 나를 알되 거기에 갇히지 말 것.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것.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건 중용이 아닐까. 쉽지 않지만, 훈련이라 했으니 천천히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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