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서평 no.4
아호파파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에세이김세라
★★★★★1933년생 강순희는 하얼빈에서 유년을 보내고, 평안북도 박천과 평양에서 학교를 다니다 전쟁이 나자 열여덟 나이에 가족 일곱 명을 설득해 전원을 이끌고 월남했고, 부산에서 한국은행에 다니다 육군 장교 우홍선과 연애결혼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세대 누구나 겪었을 법한 삶이다.
그러나 1975년 4월 9일 새벽, 남편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대법원 확정판결 후 스무 시간도 되지 않아 사형당하면서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장면 한복판에 놓인다. 이 책은 93살 강순희의 구술을 유시민이 받아 적고 엮은 기록인데, 본문 초반 학창 시절을 회고하던 대담에서 강순희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책 전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역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게 다 역사예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본문 초반, 평양 학창 시절을 회고하며)
거창한 역사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읽었을 뿐인데, 다 읽고 나면 식민지·만주 이주·해방·전쟁·피난·개발독재·사법살인·민주화·재심까지 100년의 한국사가 통과해 간 느낌이 남는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바로 그 압축에 있다. 개인의 기억이 곧 역사의 실물이라는 것, 교과서의 연표가 실제로는 누군가의 부엌과 안방과 법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이 책만큼 실감하게 하는 기록은 드물다.
울며 매달린 사랑이 아니라, 근거를 들고 싸운 사랑
이 책의 백미는 강순희가 남편을 지키기 위해 싸운 방식이다. 그는 울며 매달리는 피해자 가족의 전형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1974년 남편이 연행되고 면회조차 금지되자, 그는 숙명여대 도서관에 가서 10년 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의 경향신문 기사를 네 시간에 걸쳐 전부 복사해 나왔고, 두 사건의 수사 책임자(이용택·신직수)가 동일 인물임을 밝혀내 사건이 "한약 재탕하듯이 우려 먹는" 조작임을 폭로했다. 중앙정보부 6국에 48시간 강제연행되었을 때는 수사관과 일문일답을 벌이며 공판기록이 조작된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그 경위를 글로 써서 기도회에서 폭로했다. 남편이 연행되던 날 겁에 질려 나오지도 못한 그를 두고 "여편네가 나오지도 않더라"며 저희끼리 비웃던 정보기관 앞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증거와 논리를 갖춘 집요한 노동이 된다. 훗날 재심 법정에서 그가 자부한 것도 바로 이 대목 — 1차 사건 재탕과 공판기록 조작을 자기 손으로 밝혀냈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보부에 갈 때 선글라스를 끼고 양장을 빼입고 간 일화도 같은 맥락이다. 1차 사건 때 "당신네만 반공하는 거 아니오. 나도 목숨 걸고 여기까지 왔소"라고 맞서자 수사관이 "네까짓 게 무슨 반공을 해?"라고 윽박질렀다는 회고에서 보듯, 그의 차림새는 허영이 아니라 얕잡아 보지 말라는 온몸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당당함의 뿌리를 책은 어린 시절 받은 사랑에서 찾는다. "남도 살리고 나도 살자"던 하얼빈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 "법으로 살지 말고 정으로 살자"던 시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1975년 2월 8일 동아일보 격려광고에 실은 남편을 향한 사랑.
싸움의 언어 또한 그의 것이었다. 1974년 12월 5일 가족 일동 명의로 명동성당에서 읽은 호소문에서 그들은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정치 제물로 삼는다면 그 제물 위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이 피더라도 향기 없는 꽃이요, 빛깔 없는 꽃이요, 생명력이 없는 꽃일 것"이라고 썼고, 백지 광고 사태 한복판의 동아일보에 실은 격려광고는 이렇게 끝난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삶의 전부입니다." (동아일보 격려광고, 1975.2.8 — "세칭 인혁당 관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우홍선 피고인의 아내")
이 광고가 실린 두 달 뒤 남편은 처형된다.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가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 열다섯이 탄원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사법살인을 막지 못했다. 사형 후 강순희는 몇 달을 드러누웠고, 장롱을 주먹으로 치다 한쪽 눈을 거의 쓰지 못하게 될 뻔했다. 그러나 네 남매를 위해 일어나 계와 꿀·로열젤리 장사로 가족을 부양했고, 32년 뒤인 2007년 재심 무죄 판결을 받아낸다. 그날 법정을 나서며 운 그에게 기자들이 이겼는데 왜 우느냐고 묻자 그는 답한다.
"이겼으니까 더 억울하지. 이렇게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까." (2007년 재심 무죄 판결 직후를 회고하며)
무죄가 곧 국가가 살인을 인정한 것이라는 이 역설만큼 사법살인의 본질을 정확히 찌르는 말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국가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979년 남민전 사건 때는 사형수의 속옷으로 조직의 깃발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과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고, 1981년에는 남편들을 죄인으로 그린 반공 라디오 프로그램에 항의하러 녹음기를 들고 여의도 방송국까지 쳐들어가 결국 프로그램을 없애 버렸다. 밤에 술 한잔 먹고 경찰서에 전화해 숙직 형사에게 "네놈들이 사람을 죽였다"고 욕을 하고 '일송정 푸른 솔은' 같은 노래를 불러 젖힌 것도, 그의 표현대로 "그렇게라도 안 하고는 살 수가 없더라고"였다. 정신 줄을 놓은 게 아니라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이 대목들에서 책은 비극의 기록이기를 멈추고, 짓밟히기를 거부한 한 사람의 생존 기술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유가족 운동 안에서도 제 노선을 지켰다는 점이다. 그는 국회 앞 천막 농성에 나가지 않았고,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신청도 오래 거부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내 남편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재판으로 죽었으니 재판으로 싸우겠다는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 재심으로 이겼고, 그러면서도 다른 길을 간 이영교 씨의 공을 "덕분에 우리가 지금 편안하게 된 거"라고 흔쾌히 인정한다. 뭉뚱그려진 '유가족'이 아니라 생각과 방식이 다른 개인들이 서로 기대며 싸웠다는 사실을, 이 책은 미화 없이 보여준다.
한계 — 구술의 빛과 그늘
이 책의 미덕과 한계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구술이라는 형식이다. 유시민 스스로 에필로그에서 인정하듯 이 책의 강순희는 "이미 80살에 가까웠던 강순희가 기억으로 재구성한 강순희"다. 기억은 검증된 사료가 아니며, 자기 서사는 시간이 지나며 매끄럽게 다듬어지기 마련이다. 편집자들이 본문 곳곳에 김낙중·문익환·리영희 등 주변 인물의 객관 정보를 편집자 주로 보강해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사건 자체에 대한 교차 검증은 이 책의 몫이 아니다.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은 입구이지 종착지가 될 수 없다.
또 하나, 대담을 그대로 옮긴 구성이라 이야기가 시간순과 주제순 사이를 오가며 반복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명예회복 거부, 농성 불참 같은 강순희의 독자 노선은 더 파고들 만한 논쟁거리인데, 유시민이 질문자이자 경청자의 자리에 머물며 논쟁을 걸지 않은 점은 아쉽다. 다만 이것은 이 책이 평전이 아니라 구술 기록임을 감안하면 의도된 절제로 읽을 수도 있겠다.
총평 — 철학자의 탄생
책의 마지막에서 유시민은 강순희를 "철학자"라 부른다. 재심까지 32년을 싸우고도 그는 자신의 삶을 "행복했다, 불행했다"로 정리하지 않는다.
"주어진 운명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며 살았다는 걸로 나는 만족해요." (마지막 인터뷰에서)
국가가 남편을 죽였고 세상이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원한의 인간이 아니라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이 기록을 끝맺는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자 그가 꼽은 것은 자식들의 성취가 아니라 범어사에서 비를 피하며 '나 하나의 사랑'을 함께 부르던 우홍선과의 첫 데이트였다. 그 사랑이 그를 살게 했고, 그 힘의 이름이 책 제목이 되었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진다는 것.
싸움의 결실은 개인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배상금 일부를 출연해 4.9통일평화재단을 세웠고, 이 책의 뼈대가 된 2011년의 다섯 차례 15시간 구술 기록도 그 재단의 사업으로 남은 것이다. 한을 품은 개인의 기억이 공적 기록이 되고, 그 기록이 15년 뒤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는 과정 자체가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말의 실물이다.
이 책은 인혁당 사건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사랑받고 자란 사람이 얼마나 단단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증언이다. 굴곡의 현대사를 산 부모 세대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 그리고 국가폭력 앞에서 개인의 존엄이 어떻게 지켜지는지 보고 싶은 독자에게 권한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일이 산 자를 살린다는 것을, 이 책은 한 여인의 목소리로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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