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 — IndigoB의 서평
IndigoB

행복의 기원
인문학서은국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십몇 년 전, 초판이 나왔을 때였다.
행복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념론에서 벗어나 다윈의 진화론으로 해석하겠다는 시각이 신선했다.
서은국 교수는 사회인지학을 한국에 처음 알린 선구자 같은 분이었고, 행복이란 관념을 뇌의 신호로 풀어내는 시도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펼치니, 너무 진화론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하게 되었다.
저자는 "행복에 새로운 옷을 입혀봐야 할 것이다.
수천 년간 걸쳐왔던 철학의 옷을 벗겨내고 좀 더 진화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자"(3장)고 선언하는데, 의도는 이해하지만 철학의 옷을 너무 가볍게 벗겨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진화론이 사실이라 해도, 사실만으로 삶의 방향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공감하는 대목은 있었다.
저자가 "불행한 사람에게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손에 못이 박힌 사람에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과 비슷하다"(8장, '행복을 위한 지침들')고 쓰는데, 나도 피부로 느끼는 이야기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란 말은 피상적인 위로에 불과하다.
옆에서 할 수 있는 건 같이 밥을 먹으면서 기분 전환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지,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쾌감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쾌감이 계속되기만 하면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중독이다.
쾌든 불쾌든 적정선에서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쾌와 불쾌의 감정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려주는 생존 신호등이다"(4장, '행복의 렌즈') — 빨간불과 파란불이란 비유에는 동의한다.
저자는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초기화 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한 그 무엇을 다시 찾는다"(6장)고 설명하는데, 이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맛있는 걸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어지는 이유가 뇌의 초기화 때문이라니,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다.
결국 만족이 지속되지 않는 건 결함이 아니라 설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빈곤한 인생은 곁에 사람이 없는 인생이다"(7장, '사람이 답이다')라고 단정짓고, "오르고 싶어 하는 산은 똑같다.
사람들이 즐겁게 모여 있는 정상"(7장)이라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내향형이고, 1대 다수는 힘들지만 1대1로 만나면 편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내향적인 사람에게 정상은 많은 사람이 모인 광장이 아니라, 마음 통하는 한 사람이 옆에 있는 곳이다.
저자도 같은 장에서 "내향적인 사람들이 산보다 바다를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7장)라고 쓰며 내향인도 사람을 원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그 '산 정상'의 모습이 꼭 북적이는 광장일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용한 찻집에서 한 사람과 깊이 대화하는 것도 충분히 정상에 오른 것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6장,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 여기에는 공감한다.
아침에 드립커피를 내리며 오늘 뭐 하지 생각하는 시간, 오전 독서, 오후에 컴퓨터를 켜는 시간.
이 루틴을 방해 없이 해나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저자의 말대로 "행복공화국에는 냉장고라는 것이 없다.
남는 옵션은 하나다.
모든 것은 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주 여러 번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이다"(6장).
나에게 그 아이스크림은 거창한 성취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루틴 속에 있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셨던 길을 가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 기준으로 특이한 사람이었겠지만 후회는 없다.
지금 쓰고 싶은 글을 쓰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행복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
이 책이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오늘의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고, 그 경험을 나누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다.
5점 만점에 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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