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이라는 이름의 힘 — 『행복의 정복』을 읽고
권민정

행복의 정복
인문학버트런드 러셀
솔직히 이 책이 처음부터 깊이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70대 중반이고, 러셀이 짚어주는 불행의 원인들 — 경쟁, 권태, 죄의식 — 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제문을 보면서 내가 책에 줄 그어놓은 대목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시 한 번 책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내 삶을 꽤 오랫동안 되짚어보았다.
나는 경쟁을 별로 안 하고 살았다. 아들 많은 집에 딸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결혼해서도 시댁 식구들이 며느리에게 잘하는 집이었다. 3남 3녀 시우가 있는 대가족 속에서, 사람 가운데 사는 삶이 자연스러웠다. 러셀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성공을 위한 투쟁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성공 투쟁의 한가운데를 비껴간 셈이다. 다만 지금 우리 자녀 세대를 보면, 돈이 모든 것의 가치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쓸데없이 위험한 투자에까지 손을 대는 모습이 걱정스럽다. 만족하면서 나아가면 좋겠는데, 그게 쉽지 않은 시대인 것 같다.
몇 년 전 서울 집을 팔고 용인으로 왔다. 딸 애 봐주려고 온 것인데, 집을 판 직후 가격이 크게 올랐다. 주위에서 아깝다는 소리를 하면 잠깐 흔들리기도 했지만, 마음의 99퍼센트는 편안했다. 신앙이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만족하면서 살자 — 그게 내 방식이다. 러셀은 이런 처방을 내놓는다.
건전하고 조용한 기쁨을 삶의 조화로운 이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 _ 1부 3장, '경쟁'
그런데 그것이 내게는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그저 일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 삶에 죄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편찮으셨는데, 아들들은 서울에 없어서 사실상 내가 돌봐야 하는 위치였다. 주위에서는 잘한다고 했지만, 돌아가시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지막에 우리 집으로 모셔와서 좀 더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이 가슴에 남아 있다. 러셀은 우리가 흔히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렇게 본다.
여섯 살 전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비합리적 도덕 교육이 무의식에 남은 흔적 _ 1부 7장, '죄의식'
하지만 내 이 마음을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충분히 잘해 주셨던 어머니에게 나는 그만큼 못했다는 그 감정은, 이성으로 털어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이 대목에서 러셀의 처방이 모든 사람에게 다 맞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평론 공부와 철학 공부에 열의를 쏟고 있다. 지난주에 평론 수업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고 모욕감을 느꼈는데, 오히려 더 잘 써보겠다는 열기가 올라왔다. 소크라테스부터 현대 철학자까지 5개월째 반도 못 끝낸 어려운 책을 붙들고 있지만, 너무 재미있다. 러셀은 행복한 사람을 건강한 식욕으로 음식을 즐기며 적당히 먹는 사람에 비유했는데, 지금 내가 딱 그렇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끓어올라서 하는 것. 러셀이 말한 '진짜 열의'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라면, 나는 몇 년 전부터 사람을 넘어 사물에까지 연민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글을 오래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십몇 년 전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 우물 두 개를 팠는데, 최근에 그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물이 여전히 잘 나오고, 관리를 잘해서 앞으로 15년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300만 원이라는 돈이 한 마을 사람들에게 25년의 물을 준 셈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진짜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있다 — 동물들을 위한 우물. 아프리카 차드에서 물이 없어 코끼리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십몇 년째 머릿속에 품고 있는 소원이다. 아마 오래 걸리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러셀은 시선을 외부로 돌리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했다. 나는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안만 파고들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밖만 본다고 삶이 충만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확인한 것이 있다면 —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조용하지만 가장 단단한 힘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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